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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시 102:18]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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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느냐?

창세기 3:22-24, 마가8:22-38, 로마서1:18-20

2010년 8월 22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무엇이 보이느냐?' 라는 말은 예수께서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눈을 치유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느냐?" 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눈 먼 사람은 하늘을 쳐다 보며 하는 말이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이 보는 세상의 모든 것 그 무엇이든지 다 보이는 것이다. 이는 창조가 긍정적인 이해로 창조 자체가 살아 있는 것 모두가 다 움직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창조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눈으로 보아서 관찰할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나 사물과 현상을 이루고 있는 사상(事象 events)의 정상적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일상생활에서 창조된 대상물로 시간, 우연, 그리고 다양한 자연과정의 결과로 생긴 대상물을 보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창조의 대상은 모두가 움직인다.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은 곧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은 생명인 우리가 창조자의 창조행위를 보지 않고서도 그 창조의 증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여 알게 한다. 예컨데 눈(雪snow)송이는 우리로 하여금 놀랄 만큼 그 모양이 아름다운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양 또한 복잡하고 놀랍다. 눈송이 하나하나는 섭씨 영도 이하의 상태에서 물의 분자가 자연적으로 무엇을 행함으로 아름다운 6각형으로 디자인 되어 결과물로 눈꽃송이가 만들어진다. 패션의 디자인들은 눈송이 패턴을 본따 모자이크 타일을 만들지만 눈송이 보다는 품위가 떨어진 것을 알게 한다. 이같은 패턴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눈송이 같이 자연발생 체계가 전체의 성질에서 부분의 성질로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고 하는 것이다. 요컨데 창조에서 보면 시간, 우연, 자연과정이 만들어 낸 체계의 질서는 '외부의 결정'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이 멀어 창조의 신비를 보고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진행이 잘못되어 병이 생기면 제조자의 원리를 알아야 고치게 되고 치유함을 받을 수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제조자와 사용자와의 약속에서 이루어 지는 현상임을 알게 된다.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하기에 질서가 우선되어야 원리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는 유일하신 신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영원 전부터 홀로 계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며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창조되지 않는 신의 생명을 혼자만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이 생명은 신성한 생명이며 그 생명을 가지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된 피조자나 피조물은 영원하지 못한다. 이것은 생명이 자기 소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된 생명이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이 되면 창조된 생명은 신성해지며 또 영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 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아버지의 생명과 함께 하도록 잠시 창조된 육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 생명나무로 오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창조된 육체의 죽음을 당하신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아버지의 그

신성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예수의 성육신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은 생명을 얻기 위한 구원의 역사이다. 구원의 생명은 십자가로 죽으셔서 음부에 내려 가시고 위로 솟구치는 생명의 부활을 알게 한다. 이는 한 알의 씨앗이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 묻히어 삶이 흙과 엉키어야 하고 그 땅 속에서 생명이 솟아오르는 이치를 터득케 하는 것이다. 나무의 성장은 이것을 간증한다. 본문에서 눈 먼 사람에게 예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는 말씀에 곧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움직이는 생명이 보인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1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한 경험은 삶에서 얻어 낸 신앙생활에 유의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 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바는 곧 생명의 관리자로 창조와 질서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땅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보는 뜻도 마음도 잃지 않아야 함을 알게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분명히 달랐다. 바울은 예수를 핍박했고 대제사장 가야바로 부터 허락서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잡기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도중 빛을 보고 실명(失明)한다. 이어 예수께서 말씀하시를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물으시고 바울이 '누구세요?' 하고 물으니 예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니라" 하신다. 이것은 삶의 태도로 보아 죽음의 길로 향하는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보게 하며 다마스커스사건 이후 땅에 머무는 삶에서 하늘의 사람으로서 하늘을 보는 살아있는 삶으로 그 삶의 자리를 하늘. 땅. 사람을 함께 엮어내는 그리스도교의 삶을 보이는 것이다.

이 땅의 인류는 지난 200년 동안 땅에서 살아온 삶에서 삶의 모순으로 위기와 갈등에 서 있음을 본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지구의 생명체는 크게 손상을 입어 인류는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이것은 땅에 것만 보고 살아온 인간 역사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보게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공해, 자연 자원의 낭비가 긴장을 만들어 냈고 자원고갈, 오염, 생명과 그 종의 멸절, 산림과 자원, 습지와 갯벌의 상실은 지구의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최근 기후변화, 태풍, 해일 등으로 모든 생명은 훼손되고 인간의 무지와 오만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경제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인간의 삶에 생명의 위기로 지구촌은 하늘의 재앙을 겪어야만 한다. 이렇게 인류는 산업화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명 환경을 파괴하여 인류생명의 파멸이라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벳새다의 눈먼 사람의 치유' 에서 이를 알게 한다. 마가복음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눈(eye)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see)' 라는 단어를 썼으며 귀(ear)에 대한 언급으로 '들음(hear)' 의 단어를 쓰는 것은 마가복음의 중심주제가 보고 들음으로 '깨달음(understanding)' 에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눈먼 사람이 점진적으로 개안 되어짐을 보여 줌으로서 눈먼 사람이 영안이 열려 살아있는 온 세상을 창조의 신비함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문은 "무엇이 보이느냐?" 의 질문에서 바로 이어서 29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로 그 반응(이해)해 보이시는 것이다. 땅의 삶에만 치우치는 삶에 항상 불안과 위험을 달고 살던 눈먼 사람으로 오늘과 같은 처지의 인생을 보게 하고 바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임을 보게 하여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길을 보게 하는 것이며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얻어 광명을 보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눈이 멀어도 보지도 못하고 귀가 멀어도 듣지 못한 체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삶이 생활화 되어 있는 군상들에게 예수는 다시 우리 눈이 사물을 정확히 되도록 사실을 보는 안각이 되도록 "무엇이 보이느냐?" 고 말씀 하신다. 요컨데 흔히 사람들은 사물을 보는 안각이 자기중심적인데 맞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즉 성공한 사람을 높이고 실패한 사람을 무시한다. 힘있는 사람은 존경하고 힘없는 사람은 무시한다. 똑똑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바보같이 똑똑하지 못하면 멸시한다. 그러나 예수가 주목하는 눈은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이요 존경해야 할 사람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 의로운 자이다. 많이 가진 부자가 아니라 가지지 못한 가난한자에 관심을 갖는다. 꽤부리는 영악한 사람이 아니라 삶에 무게를 실고 묵묵히 행하는 자에게 예수의 안각이 향한다. 그리하여 예수는 겸손을 알게하고 섬김의 삶을 보여 주신다. 그리하여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에 거하신다. 쉽고 빠른 약삭보다는 바보처럼 사려가 깊은 배려를 하며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예수가 무슨 메시지로 우리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라고 하신가? 하고 생각해 본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참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가치이다. 삶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되어서는 아니되며 삶은 참으로 창조자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점에 유의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이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도 절망과 공허와 불안에 허덕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다. 예수는 이러한 눈먼 사람을 향하여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으신다.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나이다'는 '생명"이 보이는 것을 보게 한다.

나무를 통해 세상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근원과 삶의 과정을 살포시 알게 한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신비와 존엄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나무가 어디서 왔는 지 어떤 씨에서 작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 과정을 통해 작은 꽃 나무 하나라도 그 근원이 반드시 있음과 객체에게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더불어 나누는 삶을 담아 내면서 초라해 보이는 냉이꽃으로 부터 천년을 사는 소나무에 이르기 까지 현대인이 살면서 놓치기 쉬운 자연의 숭고한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나무에게서 묵묵히 자라며 모진 바람에서도 그 생명은 살아 움직이며 자라나는 것임을 보게 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한다. 우리 생명은 우주의 큰 생명에 속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내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생명은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생명을 어둡게 쓸 것 인가?

밝게 쓸 것인가? 이것은 자기결단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 겸손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한다.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자기의 가진 것이 자기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 하신다. 자기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소유의 사람인가? 존재의 사람인가?도 알게 한다. 이는 자기 몸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창조함을 받아 하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인가를 알게 한다. 사람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근원적인 소유의 욕구를 존재의 욕구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 진리, 생명이라' 고 하신다. 이것은 무슨 일이든지 주를 위해 사는 예수의 삶이 곧 중심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탐욕으로 눈이 멀어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탐욕으로 부터 자기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욕의 실체가 사탄이기 때문에 이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뿐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는 죽고 예수의 삶을 따르려면 하늘을 쳐다 보며 사는 삶이 생명의 삶인 것이다. 생명은 대지를 호흡하여 공기를 마시며 코로 숨을 쉰다. 생명은 죽음의 과정이다. 죽음없는 생명은 없다. 이것이 죽어야 산다는 말씀을 알게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죽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을 때 까지 살겠다는 삶이 있고 어떤 사람은 죽어도 살겠다는 사람이 있다. 죽음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창조의 이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진다. 다만 삶과 죽음에도 하나님과의 약속이 실현되어야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김으로 사는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하늘을 보고 하늘의 중심을 믿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 죽어도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심을 깨닫게 한다. 땅만 보고 걸어가는 우리에게 하늘 한번 쳐다 볼 수있는 안각의 방향이 "무엇이 보이느냐?" 의 해답은 땅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2010.08.08 08:2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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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달란트

마태복음25:14-30, 고린도후서6:7-10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착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 시대는 옳은 것이 오히려 따분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오히려 이용해 먹기 좋은 것이 되고 착한 것이 바보가 되고 순수한 것이 오히려 멍청한 것이 되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는 것으로 변해버리며 옳지 않는 것이 옳은 것으로 점점 인정되는 현실이 되었다. 또한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몫을 챙겨야 하고 그것이 바로 경쟁에서 이기는 생활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착한 사람은 언제나 경쟁력에서 뒤지는 게 당연하게 되어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바보가 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바보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속은 줄 모르고 속은 것을 말하는 바보가 있고 속은 줄 알면서 속고 사는 바보가 있다고 본다. 이런 바보는 삶 속에서 위대하게 삶을 살아온다. 이들은 덧없는 세월에서 지나 온 삶에 무게를 두고 의미를 알게 한다.

사람의 내면에는 선과 악의 양면이 존재한다. 참과 거짓, 옳고 그름으로 인생살이가 고달프다. 현재 사람들이 어렸을 때는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착한 사람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아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것에만 관심하여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느끼고 그렇게 모두가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착한 사람은 머리 숙인 사람이고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여 '그 사람 좋다', '그 사람 순하다' 는 말로 하면서 다시 그를 향하여 그 사람은 '우유부단하다', 그 사람은 '열정이 상실된 사람' '꿈도 비전도 없는 무기력한 사람' 으로 부르게 된다. 이러한 현실의 삶의 풍조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거지가 '좋은 것이 좋아' 하고 생활규범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 기준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태반(太半)을 이룬다. 이러한 삶을 '잘 사는 삶' '잘 하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이렇게 적당하게 살면 요령 있게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난 농경사회에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 밑에서 미풍양속이 통했다.

착하다는 개념은 한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고 살았던 소박한 삶으로 바르고 착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오늘의 산업사회에 와서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를 않는다. 지식정보 사회를 사는 삶은 경쟁에 시달리고 문화적 차이와 가치관의 혼돈에서 오는 생활의 변화와 우선적인 삶의 향유를 위해 '경제가 제일'이라는 생활심리가 바르게 착하게 사는 삶의 기준을 흐려 놓고 있는 것이다. '착하다'는 말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어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마음씨나 행동이)'바르다' '어질다' 하는 마음씨는 '선(善)하다' 는 '착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삶은 선(善,good)과 악(惡, bad) 혹은 옳음(right)과 그름(wrong)의 기준이 사물의 기원과 그 본성 그리고 하나님에 의한 삶의 목표가 그 이상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삶의 기준을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33년의 삶을 사신 예수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가를 알아야 한다. 자기중심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까지 보여 주셨다. 삶은 어느 누구나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삶이다. 예수는 내 삶의 기준이요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를 예수는 삶으로 보여 주시고 말씀으로 이를 알게 하신 것이었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지키는 세상의 법도 사회법이 그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사회의 법에는 민법, 국법, 국제법, 양심법, 자연법, 신법 등이 있다. 여기에 하위의 법이 상급의 법에 위배되면 천륜을 어긴다 하여 잘못된 법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늘의 법(神法)을 따르는 것이면 하위의 모든 법은 이미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 법을 아는 기본적인 상식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생활은 선(善)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다. '착할 善'을 '잘할 善'으로 바꾸어 놓는 삶이 되었다. 옛 사람들이 말하든 권선징악(勸善懲惡)같은 것은 오늘의 사회에서 멀어진지가 오래 되었다. 만일 선으로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그를 바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게 산다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게 살면 그를 일컬어 바보라고 한다. 삶에는 그 중심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착한 것을 바르게 보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아야 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알아야 삶의 가치를 알게 된다. 이것은 바르게 착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다. 바르게 살지 못하면 삶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과 그 삶을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그 대답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과는 상관치 않고 경제를 우선순위로 두는 나라는 국민총생산이나 소득 등으로 삶의 수치기준이 선진국인양 잘 사는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무역으로 인한 흑자나 그 나라의 환경수준, 그리고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잘 사는 나라로 인정하는 추세가 바꾸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예컨대 예전에는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군사적으로나 무역으로 강한 나라를 세계적으로 우세하게 보는 경향이었으나 이제는 스위스, 핀란드, 네덜란드처럼 환경이 좋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바르고 착하게 사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로 그 인식이 바꾸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서태평양솔로몬 제도와 뉴질랜드 사이에 위치해 있는 바누아투라는 나라를 보면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돈벌이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때 묻지 않는 순수하고 소박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개발도상국들이 국민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살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수준에 대한 전반적인 기대치가 낮고 그러다 보니 경쟁구도가 생기지 않는데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행복 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게 한다. 행복은 물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니라' 예수의 말씀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는 사람의 일상생활의 삶에서 그 소재를 찾는다. 달란트 비유도 마태는 당시 사회 상황에서 악덕지주의 횡포와 부익부 빈익빈의 생활을 비유의 소재로 다루고 누가는 실재의 역사를 배경으로 소재를 삼는다. 고로 마태는 예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일을 맡기신 것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재림하여 오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요 누가는 예수의 왕권을 거부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을 비유의 소재로 함을 알게 한다. 달란트의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무슨 기적적이거나 열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는 시간 선상에서 순간순간 삶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청지기의 사명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한탕주의에 만연된 삶에서는 기적과 같은 횡재나 투기와 같은 기회주의가 아니라 순간순간을 최선의 삶을 살아 영원을 얻는 삶인 것이다.

여기 우리가 아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는 그의 책자에서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 우리 교육은 경쟁의식만을 독려하고 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고 뒤틀린 교육 현실에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만 하도록 내몰리고 있는 현실에서 반 총장의 지나온 삶에서 자기의 삶을 알게 한다. 그의 학창 시절에 공부하는 이유와 간하기에 없는 시간에도 꾸준히 시간을 활용하여 그의 노력은 열과 성을 다하는 그의 학창시절을 알게 한다. 그는 50여 년 전 영어 학습 환경이 그 당시에는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영어 공부에 열정을 보인 반기문의 공부 이야기는 파다하게 소문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까지의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그는 욕심 없이 얌전한 편이었는데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일에는 꼼꼼히 챙겨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영어를 외우는 일에 습관을 길러 장래의 꿈을 잃지 않았고 그의 학교생활은 청소년 적십자단 활동으로 봉사, 예술제, 연수 등 해외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백악관 견학 후 케네디 대통령에게서 '장래 희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외교관이 되는 겁니다.' 유창하게 영어로 대답했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우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며 매순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의 생활 습성이 됨에 주목해 보게 하는 것이다. 1970년 외무고시 3기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연수를 마치고 해외 근무지로 인도를 지원하자 많은 이들에게 의외의 지원을 알게 하며 여기서 그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 되는 의지를 펼치게 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가 장성한 사람이 되기까지 충북 음성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까지 충주에서 자라면서 공부와 가난의 생활에서 촘촘히 익히는 최선을 다하는 습성 때문이라 한다.

그의 솔선수범하고 성실한 태도 및 그의 주변의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그의 성품은 그를 초고속 성장과 성숙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도덕적 삶을 견지해 왔다. 욕심이 없고 검소하기도 하지만 자기 삶의 관리가 철저히 했음을 안다. 예컨대 그는 '선한 사람이 최후에는 승리한다.'는 좌우명을 내세우고 있기도 한다. 사실로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배경은 사무총장 선거 결과에서 보아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를 응원하게 된 동기가 그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그와 같이 했던 많은 인연들이 그의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어떤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는' 반기문의 태도를 높이 평가받게 됨을 아는 것이다.

본 비유의 교훈에서는 달란트의 분배의 이유를 알게 한다. 각각 그 재능대로 5,2,1달란트를 맡기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그 재능의 능력대로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자기 처지의 분수를 알게 하고 달란트 비유의 원칙은 주인이 주인의 의도대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각 재능대로 주신다. 재능대로 주신 것은 주님이 그들의 가능성과 능력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의 달란트를 종들이 어떻게 관리 했는가를 알게 한다. 또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그 책임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한 달란트의 종은 땅에 그대로 묻어 두고 여기에 그의 달란트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 점을 알게 한다.

이로 인해 달란트의 비유는 여기에 따르는 상급이 있다. 그 상급은 '착하다'. '작은 일'에 노력을 했다함을 알고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 일컫는다. 본래 '충성'이란 말은 마음의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이라는 말이지만 충(忠)은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기준을 뜻하는 말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뜻하기도 한다. 본 '달란트 비유'(마25:14-30)의 앞과 뒤의 연결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그 뜻을 어떻게 우리가 실현하느냐 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본 비유의 앞구절(마25:1-13)은 '열 처녀의 비유'가 있고 뒷구절(25:31-46)에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교훈으로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그 때가 올 것을 기다리라는 준비된 마음을 알게 하기에 나에게 맡겨진 재능을 최선을 다해 활용하라는 지침이요 양과 염소는 한 무리에 섞여 있으면서 비슷하게 보이지만 예수께서는 거짓과 참을 구별해 내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유의 중심은 얼마의 이윤을 얻었는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착하게, 최선을 다하여 책임을 가지고 일 했느냐를 물으심에 유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일'에 '충성'했다는 말로 그를 '착하다'고 한다. 충성이라는 말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소흘하지 않고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뜻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 사명을 알게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들은 서민적인 사람들의 삶에서 사랑에 대한 의무와 책임, 우정, 일의 신성함 등의 주제를 쉽고 아름답게 표현하여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 <바보 이반>은 우둔하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한 <바보 이반>이 타고난 성실성(최선)을 바탕으로 야비하고 욕심 많은 두 형제들을 제치고 삶의 진지함을 민화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성실하고 착한 <바보 이반>과 권력욕과 소유욕을 대표하는 세묜과 타라스, 이 세 형제가 악마와 벌이는 한판 승부가 벌어지는 이야기로 권력과 돈을 탐하는 두 형과 달리 이반은 쉽게 이러한 악마와 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바보 이반>은 그의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그들에게 소박한 삶의 우월성을 알게 한다. 그는 인간이 지닌 욕심과 집착을 문학적으로 극명하게 형상화한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좋은 평가를 인정받는다. 대충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그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참된 모습으로 인물 중의 하나가 '바보' 라는 것임을 안다. '벙어리 삼룡이'가 그렇고 노들담의 꼽추 "콰찌모또" 가 그렇고 '돈키호테'를 알게 된다. 현실적으로 보면 못나고 어리석고 사람구실 못하게 생겼지만 그의 내심 감추어진 따뜻한 인간성과 온순한 마음을 일구어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삶으로 보여주는 삶이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고 사는 삶은 세상잣대로 보면 예수 믿고 '바보'가 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다메섹의 하늘의 계시된 사건은 평생 그의 삶을 통해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삶 자체였다. 그는 예수를 핍박하는 자였다.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으며 그는 유일하게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고 율법학자였다. 그리고 바리세파의 최고의 경지에 있는 율법주의자였다. 그 시대에 비쳐진 예수는 사이비 교주처럼 유대인들에게는 각인 되어 있었다. 그가 로마를 버리고 예수에게로 왔다는 사실은 그를 '바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전에 지키든 율법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며 세상이 보는 예수의 바보 같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수의 삶을 잘 알고 실천한 사람은 바울뿐임을 알게 된다. 바울은 바보처럼 사는 예수의 형극의 길, 십자가의 길을 고스란히 따르는 주의 종임을 알게 한다. 소명에 붙잡혀 사는 삶은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가 없음을 몸소 증언하는 삶으로 '주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보여 주었다. '나 중심의 삶' 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꾸는 전환의 모습을 바울에게서 보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실제로 달란트가 무엇이 어떻게 '착한 달란트' 인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마음, 목숨,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교훈을 아는 것이다. 나 받은 달란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하는 당위적인 청지기 사명을 알 게하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고스란히 땅에 묻어 둘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착한 달란트' 는 고후6:7-10

{{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 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하늘, 땅, 사람 모두는 사랑
마태6:10;13:10-23
2010년 7월 11일, 18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고대에서 현대까지 철학의 핵심에는 사랑의 열정이 있다. 고대인들은 이 열정을 경계했다. 그들은 그것을 '영혼의 착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정은 사유에 대한 사랑이요 사유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 문제는 자신의 열정들을 표방하는데 거리를 두고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 근대 세계의 인식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인간의 "생각함"을 주제로 내세우면서 중세 신앙이 갖고 있었던 사유의 벽을 깨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촉발하는 데에 그 철학적 근거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주체와 객체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인식의 흐름이고 곧 이것은 과학과 종교를 분리시키면서 그 골이 계속 깊어만 가게 만들었다. 여기에 세계관은 이신론(deism理神론)적 세계관이다. 이는 신의 존재와 진리의 근거를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에서 구하는 이론으로서 18세기 계몽 사상가들의 종교적 견해를 알게 한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이 우주를 가리켜 "수학의 언어로 쓰인 바이블"이라고 명명했다.
이 이신론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이 유신론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무신론이고 이를 향한 17세기에 등장한 뉴턴 물리학은 과학적 유물론의 결정판이자 인간 이성의 위대성에 대한 절정을 이루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들만이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무신론과 유물론을 등장시키고 과학과 신앙이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이것은 철학이 시도했던 것처럼 사랑의 열정과 이성을 결합시키려는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이때에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1881년에 프랑스 샤르세나에서 태어나 신학자로서 그의 우주론은 '과학적 진화 현상론에 관심을 가지는 분으로 그는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만이 '사랑하는 것의 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물질을 이야기하는 과학의 비물질성을 또는 신앙에서 말하는 정신에너지(얼)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 작용을 시대에 펼치며 우주는 정체적이고 불변적인 정지한 우주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상에 있는 역동적인 우주를 말하게 된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인간 현상'(1939)은 이를 알게 한다. 태초에 우주가 발생하고 태양의 파편으로 부터 나와 형성된 지구는 무기물과 생명계라는 두 세계가 본래 한 몸 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세포 단계에서는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 불 분명 하듯이 그것은 낮은 단계에서는 모호하고도 희미한 존재로 있을 뿐이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샤르댕은 이것을 '이른 생명'이 '생명'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팽창하여 우리가 아는 생물들을 번식시키고 영장류의 진화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인간 현상을 태동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일의 결과를 보고 조그만 지식으로 열악함을 가지고 우열을 가지고 선악을 구별하고 자아도 모르면서 주관이라는 미명으로 다른 것들을 심판하고 재단하고 도태시키며 무리하게 인식하고 믿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은 참(眞)이고 하늘 아닌 그 밖의 것은 간사한 사(邪)가 되어 있어 참(眞)을 따르는 것은 정(正)이 되는데 사람이 정(正)으로 행하지 않으면 사(邪)를 따르는 것이 됨으로 참(眞)을 아는 이치를 터득해야 참된 진리를 찾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지에서 탈출하는 것, 혼돈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인 가치관을 형성해야 함에 이른다.
그 궁극적인 가치는 세상 처음의 이치를 터득하여 우주의 참된 도리를 찾는 것이다. 참(眞)은 색채와 형태가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이치, 절대 생명, 으뜸 생명, 근본 생명, 부모와 같은 생명, 속 생명, 주(主)가 되는 생명, 근본 또는 나무 전체의 생명을 뜻하고 반면에 사(邪=간사함)는 색채와 형태가 있음으로 언젠가는 변하는 상대생명, 종(從)이 되는 생명, 줄기나 잎에 해당하는 생명, 지식과 같은 생명, 겉 생명, 종이나 객이 되는 생명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생명으로서 어떻게 존재하는 가를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 땅,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을 알게 하고 하나의 이치를 알게 하며 시간이 가는 과정가운데 창조된 공간에서 생명의 질서를 알게 한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자와의 교통과 순환관계가 섭리의 의도대로 질서 회복해 간다는 것이다. 여기 하늘, 땅, 사람은 모두 하나 되어 창조의 실현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인류는 하늘의 뜻을 져버리고 창조의 약속을 어기면서 땅을 파괴하고 하늘을 역천(逆天)하며 사람들은 갈등으로 인류는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로 보면 창조함을 받은 피조적인 땅, 사람의 관계는 필연적인 이치로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생명현상은 특성이 있는데 생명이 있는 것은 복잡하고 정교하여 물질대사를 하며 환경에서 에너지를 받아 생명현상을 유지하며 생장하고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번식한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다양한 생물들을 보고 그 생명 현상의 특성을 연구하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분자 수준에서 부터 생태학적 수준까지 관찰하고 실험하면서 오늘날 생명과학 분야는 전례 없는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질서 있고 조직적인 생물들은 처음부터 그 특이한 형태를 갖고 종류대로 초자연적인 계획과 설계에 따라 창조되어 간다고 보는 견해로서 천지창조의 내용은 우주의 형성, 해와 달의 창조, 인류의 기원 등으로부터 작게는 동물과 초목과 곤충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까지 모두를 알게 한다. 이것은 우주관의 축약 내지 과학의 모태이기도 하고 전 세계적인 보편적 사고구조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나름의 진실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늘은 땅과 사람이 하나로 관계한다. 땅은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관계하고 사람은 하늘과 땅과 하나로 관계한다는 상호간의 사이(間)의 이치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 모두는 사랑의 의미와 그 가치로 존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땅, 사람은 서로 사랑하며 행사하는 존재가치가 된 것이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에서 끌어당기는 힘, 즉 '중력'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만을 말하나 이를 상응하는 사물의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랑에너지야 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다음 생명으로 이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은 그 자신의 불안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나의 참다운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생존하는 그러한 정신의 합일점이 오직 사람이 그리스도적 자아와 완벽하게 합일되는 차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땅과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는 지평을 알게 한다. 여기에 샤르댕은 진화는 궁극적으로 진화의 궁극점이 "오메가 포인트"라 한다. 그는 우주의 목적인 그리스도를 오메가 포인트로 고백한다. 그의 깊은 우주의 통찰을 통해 신앙과 과학은 대립되지 않고 오히려 과학적 탐구는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에 대한 탐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사랑하는 것'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똑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운데서 사랑으로 교통하는 차원임을 알게 한다. 이제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이 새로운 세계로 태동할 것이며 사람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하여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샤르댕은 그의 오메가 포인트 성취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에 의해 작동 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에 오메가 포인트 성취는 존재의 믿음의 여하에 달려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의 오메가 포인트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늘, 땅, 사람 모두는 사랑"이며 생명이다. 그리하여 진화는 곧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주 천체의 모든 별들이나 지구 안에 존재하는 공기, 물, 식물, 광물 같은 모든 물질은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은 하늘, 땅, 사람에게 생명과 생명체를 주었고 이를 운행하기 위해 해와 달로 그 지음을 도우면서 사랑한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땅과 사람을 살림(生)을 하고 사람은 그 살림의 원리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하늘에는 사시사철과 팔 계절과 이십사절후가 있고 땅에는 동서남북 사방이 있고 팔 방위와 이십사방위가 있어 인간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하에 체질과 그 기질이 따로 따로 되어 기운을 얻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통하여 하나인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우리가 눈여겨 성서의 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하늘나라 설파(說破)가 필요할 할 때 마다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우주적인 관계를 알고 늘 비유로 말씀하심에 대하여 주목하게 된다. 예수 이전의 시대의 랍비문헌에는 단 하나의 비유(比喩)도 전해진 바가 없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의 설파(設破)에서 예수의 비유는 무식한 사람이나 어린 아이가 듣더라도 곧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쉬운 이야기들로 비유되어 있음을 본다. 비유는 히브리(민중)인들의 언어인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비유의 소재는 땅의 씨앗, 포도원 곡식, 가라지 그물, 고기 등등 농부나 어부에게 상용하는 익숙한 말들이었다.
예수는 어찌하여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가? 하는 문제와 예수가 사용한 이야기들은 어디서 얻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예수는 자연의 이치를 비유로 하여 사물의 내용을 드러내어 이해할 수 있게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가르침을 설파한다. 하늘, 땅, 사람으로 열거하면서 하늘나라로 하늘은 해, 새를 예로 든다. 인(人)은 인간으로 농부, 주인-소작농, 주인-과원지기, 주인과 종들, 악한 농부들을 예로 든다. 문화로 보면 파종, 추수, 밭 갈기, 발견과 감춤, 팔기와 사기, 자고 깸, 불태움, 투기, 투쟁, 살인, 위탁과 경작, 땅 살리기로 예로 든다. 지(地)는 땅을 말하며 좋은 땅, 흙, 밭, 포도원, 길, 바위 이다. 식물로는 식물이 겨자식물, 곡식, 가시나무, 밀, 가라지, 무화과나무 등이 있고 씨로서는 씨, 겨자씨이며 성장으로는 씨, 싹, 이삭, 열매를 말하며 그 열매로서 열매, 겨자열매, 무화과로 예를 들면서 땅의 소산을 말한다.
그 외에 보화, 가지, 그늘, 둥지, 배설물을 말한다. 이상의 자연 비유를 땅과 관련하여 열매를 거두기까지 성장과정을 알게 하고 성장의 환경을 알게 하며 열매와 씨가 땅과 결합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은밀히 자라나는 씨가 땅을 품으면서 뿌리 내리고 뿌리가 튼튼하면 지표 위로 싹을 틔우고 이삭을 내는 것은 모두가 사랑의 이치를 예수의 비유에서 하늘, 땅, 사람이 각각 무엇과 같고 또 그 천지인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려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한7:17) 한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의 가르침에서 우주의 세 바탕이 되는 천지인(天地人)이 비유로 하늘나라가 자연의 과정과 인간 문화를 통해 비유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하늘나라(天國)는 이 관계에 따라 의미 되는지를 알게 한다. 현대 예수전승 신학에서 높게 평가받는 비유와 어떤 사상이나 진리를 간결하고도 날카롭게 표현한 아포리즘(aphorism 경구(警句))은 하나같이 자연계와 그 일부인 인간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한다.
예수의 비유야 말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천지인(天. 地. 人)은 예수의 자연 비유를 알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땅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련의 이야기든지 또는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행위와 관련된 사랑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즉 하늘, 땅, 사람의 영역에서 이 세 가지가 다채롭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하늘과 관련된 요소들을 보면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제외하고는 '하늘나라'를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명시하는 것이다.
예수의 자연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언급한 것이며 하늘에 새들; 겨자씨, 씨 뿌리는 자 비유와 여기에 '해'를 등장시켜 밤과 낮의 순환을 제시하여 배경을 이루기도 하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자연은 자연대로 밤과 낮으로 순환하되 농부는 자연 그대로 무위(無爲)의 생활 가운데 밤에 자고 낮에는 깨는 생활의 리듬을 지키는 것이다. 자연의 리듬에 생활의 리듬을 실었고 그러는 동안 땅에 떨어진 씨앗은 성장의 리듬을 보인다. 인간의 행위가 문화라면 이들의 문화는 땅의 일, 자연과 조화로운 사랑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은 그냥 창조된 것이 아니라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비바람이 부는 천둥소리에 인고의 세월을 거쳐 잉태되는 한 생명 하나하나가 소중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이 땅 지구환경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생명의 유기체이며 흙이 숨을 쉬어 사람이 되듯이 한 처음의 생명을 이어가는 사랑의 무리들이 우리 사람임을 아는 것이다.
 [ 사람이 사랑이다 ] 하는 것은
 사람이 땅위에서 사는 것은 땅의 기운을 받기 위함이요.
 사람이 하늘 향해 서원(誓願)하는 것은 하늘의 기운을 받기 위함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기운을 받기 위함이다.
 하늘의 기운 모두는 사랑이다.
 본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 멘.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