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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시 102:18]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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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한 사회와 교회를 본다.
디모데후서 4:3-4, 사도행전4:32-35, 마태복음 19:16-30
2012. 2. 5.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풍요한 자본주의를 갈망하는 현대사회는 사회주의형 인간을 생산해 내어 시장경제의 혜택을 받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경제적 번영과 풍요가 주어진 조건이요 대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오늘의 풍요는 과거 가난과 절망 속에서 오늘의 경제시장을 만들고 치열하게 싸워왔던 노력이었다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삶의 진정성과 자기 책임의 가치는 과거 역사이자 생활양식이라고 치부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에 넘쳐나는 포르노와 동성애, 강간과 간통, 근친상간, 폭력적이고 잔인한 영화, 살인 무자비함, 우선순위와 존경의 상실, 이혼과 가족의 해체,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 쾌락추구와 퇴폐문화, 맘모니즘, 광적인 진화론과 무신론, 인본주의에 준한 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 도박, 인신매매, 짓밟힌 인권, 기계적인 인간관계, 다양성에 복잡한 사회 등 세기말적인 현상들이 오늘의 우리 시대는 사물이나 사실들이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된 뒤죽박죽 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옛 유럽교회의 몰락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회의 변화에 대한 발 빠른 대체 없이 몰락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이는 사회가 발달할 수록 교회가 성서의 가르침과 현대인의 생활방식과의 간격이 벌어지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점을 알게 한다. 교회가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교회가 만사형통과 소유의 축복으로 일관된 가운데 풍요한 삶의 향유만을 만끽한 점이 사회와 다른 바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렇게 교회의 가르침과 삶이 성서의 말씀에서 멀어지면서 세속화의 위험에 잠기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과거 유럽 교회를 비롯한 선진국교회들의 위험성은 성서와 삶의 간격을 좁히지 못한 점에 기인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현대판 최고의 교회당 이미지로 가난과 고난을 부르짖지만 더 이상 가난한 자가 아니며 거룩한 믿음을 부르짖지만 세상과 하나되어 살아간다. 가난한자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부르짖지만 나름대로는 가능한 만큼 부를 축적하며, 죄인에게 복음과 전도를 외치지만 자신이 직접 그 삶의 현장에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질 필요를 모른다. 현대 교회를 지적하면 돈과 소유를 윤리의 기준으로, 축복의 기준, 성공의 기준, 능력의 기준으로 여기고 이를 실행하며 교회는 자랑한다. 유럽교회가 문을 닫고 몰락해 온 그 처사(處事)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서의 말씀을 상고하면 디모데후서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라는 준엄한 말씀을 듣게 된다. 본래의 처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서로서로의 삶을 나누며 공동체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한 가족으로 삶을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 주인 되시는 한 가족으로 삶에 부름 받아 살았다.
이 공동체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회 구성원으로 풍성하고 향기로운 사랑과 신앙과 희망으로 공동의 삶의 비전을 보여준다. 여기에 성령의 오심으로 상호 교통, 교제는 영적, 정신적, 물질적 교제를 온전한 나눔으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삶으로 살았다. 삶의 현장에서 직접 일어나는 나눔에서 삶의 자리를 보게 한다. 사도행전에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웃과의 관계가 자기 자본적인 소유가 있고 없는 것을 넘어서서 서로 융통하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함으로 막힘이 없이 서로 관계하는 소통(疏通)을 이루는 것을 알게 한다.
이렇게 처음 교회의 순전 한 성장은 욕심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담보하고 이를 철저하게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까지 교회가 가능함을 알게 하고 중세의 종교개혁은 자기의 생명을 주님께 내어 놓았기에 가능함을 보게 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부흥운동은 부패한 사회와 교회의 회개라 한다면 종교개혁은 변질되어 버린 신앙의 순수성과 예배의 단순함에 치중했으며 예수님의 삶의 전부를 순수하게 삶의 자리에 내려 놓았다. '오직 믿음', '오직 성서'는 말씀이 삶의 자리로 내려옴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말씀과 삶의 현장이 서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성취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향유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삶이 중요함을 알게 한다.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있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받은 고난과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고 우리 안에 거해야 된다'는 진정한 호소는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위해 그 몸이 희생의 사랑이 필요한 것을 절박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만물의 모든 삶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은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는 자리에서 자란다.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삶과는 여하간에 굴러가야 하는 수레바퀴이다. 자신의 욕심과 자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늘의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풍요한 삶의 량이 아니고 삶의 질이 부흥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 삶의 자리는 가난하고 겸손하고 낮아지는 자리이다. 주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자, 갇힌 자, 나그네들과 자신을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한 자리를 펼치신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는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시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의 문제는 계명을 넘어선 '네가 온전하기를 원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 네 보화가 있다. 그리고 나의 삶을 따르라'는 말씀에 주목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수단이 아니다. 지금 나의 삶이 구원받으려면 나의 삶이 삶의 현장에 내려져야 한다. "뒤죽박죽 한 사회와 교회"를 보면서......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가정이 없는 사회
사도행전 16:31. 시편127:1-5
2012. 1. 29.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옛날에 스승은 365일 내내 존경 받는 분이었다. 옛날에 부모는 어버이로 자기를 낳아준 분으로 사랑으로 걱정해 주는 존재로 알고 자녀들은 거기에 대한 효성의 마음이 그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번거로운 행사로 스승의 날, 어버이 날이 있어 형식적 행사만으로 이를 대행하려 한다. 생각하면 옛날에는 스승으로서의 인품은 존경의 대상으로 만인의 삶의 철학을 세운 귀감이 되는 스승으로 이를 영원히 간직했다. 옛날에는 스승의 날도 없었다. 어버이에 대하여서는 지극 정성으로 혼신을 다해 하늘이 낸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사회는 사회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를 처방하기에 골몰하여 이를 켐페인으로 대처함을 알게 한다. 오늘의 우리의 생활습성은 문제를 캠페인으로 대처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에 생활이 익숙해 져 있다.
이러한 사회의 허약한 체질에 그때 그때 대충 생활의 문제를 대체(代替)해 가며 살고 있다. 이러한 대체로는 삶의 위계질서도 없고 존경과 책임도 모르고 우선 순위의 절차도 없기에 이러한 현상으로는 생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사회나 학교가 그러한 대체로는 해결할 능력이 없다. 능력이 없는 방법을 눈 앞에 있는 방식으로만 찾으려는 안타까움을 본다.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생기고 나로부터 생기는 그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정은 한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얻음으로 풍성한 생활의 유대를 얻는 공동의 정으로 삶의 철학을 가지게 한다. 이는 가정에서 배우며 부모에게서 생활철학을 습득하는 삶의 학습의 자리가 가정이며 가정환경이 사랑의 포근한 삶의 공동체로의 끈끈한 정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이러한 가정의 붕괴현상으로 일파 만파 사회현상의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는 무너진다. 가정붕괴의 문제는 가정의 연대적인 관계가 무너지고 사회는 공동체의 구축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른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지금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가정, 학교, 사회의 문제는 가정에서 기인된 삶의 가치관과 생활질서의식이 결여된 점에 유의한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선진국이라는 미명에 따라 그들의 생활습성이 합리적이고 편리하다는 여건으로 이를 선호함에 이르고 있다. 얄팍한 삶의 지식으로 주어 배운 것이 전부인 냥 삶을 영위하기에 선진의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오늘을 풍부하게 사는 삶이 전부인 냥 그것만을 위해 경쟁하며 소유욕으로만 지탱하려 함에 주목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가정이 점점 무너지고 없어져 간다. 사회는 가정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한 사회는 그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가정이 없는 사회"로 만연되어 가고 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구원은 한 사람에게만 국한하지 않았으며 그의 가족들에게 간증하고 그의 가족이 마침내 믿고 구원받게 함에 유의한다. 가정의 구원은 한 사람의 구원과 다른 것도 아니고 온 가정이 구원받아 누리도록 함에 있음을 알게 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곳은 가정이다. 이는 에덴 동산에 한 가정을 창조하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시작함은 하나님의 계획이 족장시대를 거치면서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오는 약속이었음을 안다. 구약에서 '가정'을 '미슈파하(mishpahah)'는 가족, 개인들의 가족적인 인연을 말하며 '엘레프(elep)는 가정이라는 넓은 의미로 혈통이나 결혼에 의해 연결되는 사람의 그룹을 의미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신약에서도 '파트리아'(patria)'도 '아버지'의 의미를 가진 말로 '파테르(pater)'에서 파생한 말이다. 이는 족보를 알게 한다. 이리하여 신약성서의 첫 머리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한다. 가정은 두 가지 기초 위에 세워진다. 하나님의 '창조신학'과 그 연장 선에서 '언약신학'에 근거함을 알게 한다.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16:31). '가정은 기초적인 사회체계인 만큼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한 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회적, 물리적, 정신적, 영적 생활환경이며 교육적 환경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 어느 한 사람의 정서적 상처는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가정이 점점 무너지고 없어져 간다. 사회는 가정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한 사회는 그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한 가정이 병들면 그 사회도 병들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에 전하여 온 바울과 실라는 복음의 캠페인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 하면서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믿음의 최종 목적은 선택된 자만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함을 받는 점에 이르게 한다.
어느 뜻있는 학자가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미국적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가 없다. 경제, 교육, 문화, 정치 면에서 그렇다고 한다. 세계는 지금 경제적 불황으로 심리적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경제의 혼란과 부진 때문에 미국에 의존된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세계학자들은 미국식 경제와 사회시스템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 미국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는 돈에 대한 소유 문제와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의 효용가치에 대한 인식이 사회전반에 팽배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세계적인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노골적(露骨的)으로 표현한다. 이는 물욕에만 치중하는 속물근성으로 말하는 스노비즘(snobbism)을 말한다. 이는 사회가 이상(理想)의 시대가 소멸하고 난 후에 허구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즉 이상은 없는데 그 이상에 대한 욕구만이 남아서 그 형식만이 잔존한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나 여러 초월적 가치들을 그 자리에 내려 놓고 여전히 이상의 시대처럼 믿으려고 하는 그런 내용 없는 형식의 시대가 바로 오늘의 우리의 스노비즘 시대라는 것이다.
스노비즘과 동물화는 헤겔의 학자 코제브의 '역사의 증언'에서 말한 대로 두 가지 시대로 '허구의 시대'와 '동물의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음악감상이나 영화에서도 동물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는 동물화를 내부지향과 연결시킨 것을 아는 것이다. 이는 속물근성의 태도를 인간들이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존의식은 스노비즘과 '동물의 회귀'이라는 것이다. 코제브가 동물이라 부르는 것은 미국의 소비자를 의식해서 부르는 것이다. 스노비즘은 고상한 체 하는 속물근성, 또는 출신이나 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일을 말한다. 이 의미에서 '인간의 동물화는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확실한 일처럼 보인다'라고 들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람들이 관념적 질문이나 도전 혁명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내면적 성찰 없이 오직 외부에서 주어지는 물질적 소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 올리고 그저 물질적 촉감과 만족을 찾는 오직 살아남고 즐기기 위해 목적만이 존재하는 자기이익추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동물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깊은 관심과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더 자극적인 재미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추구로 살아가는 동물적 삶의 모습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사회가 '속물근성으로 채워진 사회'를 알게 한다. 이는 가정생활학습에서 생활철학이 없이 핵가족시대로 사회는 넘쳐난다.
가정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며 깊은 신뢰의 관계가 넘쳐난다. 부모와 자녀가 없는 가정은 외롭고 쓸쓸한 텅 빈 집이다. 가정이 없는 사회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닌 관계가 단절된 곳으로 갈등만이 남는다. 사람 사는 사회에 가정의 사람이 없음은 동물사회를 보게 한다. 집은 아버지 하나님이 세운 가정이요 사회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얻는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새해인사는 '복 받는 자'가 아닌 '복 있는 자'
마태복음5:2-10, 시편1:16
2012. 1. 22.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을 음력 정월 초 하룻날을 원단, 세수, 정초라 한다. 그리하여 설이라는 말은 '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한다'는 뜻으로 '살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웃어른께 인사하고 새 옷인 설빔을 입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차례를 한다. 이는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근원을 찾는 마음이며 나의 뿌리를 찾는 마음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이야기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삶의 관계가 있는가를 성서에서 살핀다. 그리하여 많은 믿음의 조상들의 공통된 고백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 후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는 역사와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들을 불러 약속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경륜을 증언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렇게 새해인사는 삶에서 그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다. 우리 경제는 그 동안 고도 성장으로 100불 시대에서 20,000불 시대를 달성했으니 절대빈곤 문제가 해결되어감에 따라 생존욕구에서 다른 욕구의 상승으로 오늘의 우리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자리는 착한 마음씨보다는 차디찬 인정, 바른 생활보다는 눈치 빠른 언동, 실력보다는 돈, 능력보다는 학벌과 문벌, 창의력보다는 순종과 반응, 비판력보다는 해석력, 친구보다는 권력, 공동체의식보다는 조직, 의리보다는 실리를 우선하는 한국병의 생활 풍토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병폐를 보면서 오늘의 새해인사 문화를 보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 습성을 보고 한심스럽기가 그지 없다. '복'이라는 전제된 새해 인사에는 '부자 되세요'라는 소원이 담겨 있다. 이러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로 삶에서 그 예를 들어 보면 의사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 한다면 금년에는 병 드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 병원이 차고 넘치라는 기원이 될 것이요, 변호사에게 이러한 인사는 금년에 무질서와 폭력이 사회에 만연해야 될 것이며 장의사에게 이런 인사는 많은 사람의 죽음을 기대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상대의 불행을 위한 기원이 되는 인사는 돈 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인사문화가 삶을 영위하는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돈 벌이라도 하라는 구호처럼 느껴져 심히 마음이 쓸쓸하다. 풍부와 풍성이라는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사는 것이다. 풍부하다는 것은 넉넉하게 많다는 것이요 풍성하다는 말은 푸짐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는 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소유는 복 받는 자이고 존재는 복 있는 자이다. 삶의 량은 실용주의에 효능과 기능을 부러워하지만 삶의 질은 존재하는 의미를 알게 하고 전자는 성과주의에 연연하여 성공이 최 우선이지만 삶의 질은 사람의 복지나 행복의 정도를 알게 한다. 삶의 질에는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을 말한다.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심미적 만족과 사랑과 존경의 욕구실현에 인간의 삶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산상 수훈에서 '복 받는 자'가 아닌 '복 있는 자'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자비로운 사람은 복이 있다. 마음을 깨끗이 한 사람은 복이 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심에 주목한다. 시편 기자도 삶에는 두 가지 길을 가는 사람을 제시한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길을 가는 사람' 임을 알게 한다.
복이라는 삶의 풀이를 하면 삶은 행운이 아니라 행복이다. 행운은 복을 받아서 얻는 기쁨이고 행복은 하는 일에 만족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는 복 있는 자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성서에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선진화는 물질의 풍부와 풍요에 있지 않고 다같이 풍성하게 사는 삶의 질로서 그 가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나라의 경제 발전과 번영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경제적인 풍부와 윤택함에 가치관을 세우고 살아 왔지만 이제는 낡고 폐습 된 배금주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롭게 정신적 삶을 영위해야 할 때를 맞았다. 근대 자본주의로 욕구 충족을 목적으로 삼아 개인주의 사회가 이상형으로 되는 물질적인 복을 우선하는 새해인사에는 문제가 있음을 알게 한다. 공동의 이익과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질이 풍성한 인사문화 정착을 바로 해야 한다.
오늘의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에 유감(有感)을 표하며 “복 받는 자”가 아닌 “복 있는 자”로 바꾸어 영어의 새해 인사 "Happy New Year"처럼 "새해 행복하세요"! 의 인사(人事)로 고쳐 쓰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