泉水(샘물) 裵聖山 목사의 삶과 목회관 첫째 마당 / 인생관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 둘째 마당 / 목사상 (예수는 누구?) 셋째 마당 / 목회관 (信之 民衆化, 望之 歷史化, 愛之 人間化) 배 성 산 목 사
나는 지금 이 지면을 빌어 나의 인생관인 기독교적 인생관을 피력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감으로 목사라는 성직을 택하여 감히 '복음의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며 충성과 복종만이 그 생명이라고 여기며 걸어온 목사상의 삶과 교회생활을 통하여 사역하는 나의 목회관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구한말, 나라는 곧장 한일합방이라는 국권 상실의 국난을 당했고 그 후 일제의 가혹한 식민 정책에 의한 잔인한 민족탄압의 질곡 밑에서 교회도 함께 그 쓰라린 탄압을 받았을 때, 한국 교회는 독립운동으로, 또한 개화 운동의 선봉자로 애국과 개화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1945년 광복을 맞아 그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념의 갈등으로 6.25라는 민족 수난의 비극적인 동족 상잔의 불행이 저질러지고, 4.19혁명, 5.16군사 쿠데타, 유신체제, 10.26 시해사건, 5.18 민주항쟁, 5공, 6공의 군사 문화를 지나 문민정부의 무능과 이제 국민정부, 참여정부, 경제실용주의 정부라는 격동의 역사를 거쳐왔다. 이러한 우리 민족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구조의 많은 변화들은 우리 개개인의 가치관과 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쳐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였다. 일본 식민 정책의 탄압 아래 무녀독남 3대 독자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신앙을 모태에서부터 받아 부모의 태중에서부터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어 지금은 5대째 내려 오는 신앙의 가정을 일구었다. 순회전도인이셨던 할머니의 신앙생활과 아버지의 보수 정통의 철저한 신앙관을 받은 나는 한국신학대학에 입문하여 학문의 자유 속에 현대 신학 이해로 신앙과 신학의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신앙의 복판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 바탕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얻어지는 축복, 즉 돈이라든지 사회적 지위라든지 명망이라든지 마음의 평안, 신유 등 그것이 핵심이 되어서 그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가? 우리가 진지하게 신학적 눈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가 사실로 나 자신에게는 손해도 되고 때로는 고생이 따르며 멸시와 천대와 수욕이 수반되더라도 하나님의 뜻만 성취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는가? 실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것이 우리 신 앙의 정직한 내용이 되지 못하는 신앙 행위의 실천이 항상 문제되어 왔다. 이러한 갈등 속에 새로운 신학의 방향과 선교의 자세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 민족의 역사 속에서 실제적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선교 정책을 절대로 찬동하고 그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다. 한국에 태어난 나의 삶은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여 겨레의 고난을 함께 나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이 "내가 나 됨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됨"이라고 고백한 것처럼(고전 15:10) 하나님의 계획과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역사(役事)라는 신앙고백이 나의 지천명(持天命)이 되었다. 5대째 내려 오는 신앙의 가정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믿음, 소망, 사랑의 信望愛三者恒存(고전 13:13) 가훈을 이어받고 지금은 5대 가족(목사 2명, 원로 장로, 권사, 4남매, 며느리, 사위, 손자손녀들 등) 17식구가 세대 차이를 넘어 한 지붕, 한 신앙, 가정 공동체로 한 공간을 이루며 몸소 가훈을 실천하고 있다. 한편 나는 나의 아호(雅號)를 '샘물'(泉水)로 이름한다(이사야41:18). 이것은 나의 삶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생수는 샘물이어야 한다.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생수는 청량제이며 물은 생명의 원천이요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물은 생명의 번영과 발전의 원동력이요 평화의 요소이다. 물은 생명을 소생시키며 깨끗하게 생명을 윤택하게 풍성하게 하여 성장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왜 마음의 평안이 없으며, 가정 화평에 생기가 없으며, 사회의 갈등구조가 생기는가?
그리고 교회가 왜 불화하고
가족끼리 왜 갈등이 생기는가? 이것은 은혜의 생수가 없어서이다. 샘물은
신선하고 흘러내리는 속성이 있다. 큰 바위나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는
지혜도 있고, 높은 장벽을 만나면 샘물은 흐르기를 멈추고 고이고 고여
큰물이 된 다음 그 장애물을 넘어간다. 물은 모가 없이 무색무취로 신선함과
생동감을 준다. 샘물처럼 사는 삶은 은혜 있으리라 이러한 삶의 철학이
전 생애를 이루어가는 삶이기를 평소에 늘 기도하며 살아간다. (사 41:18)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
목사가 된다함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감이다. 평소에 나는 늘 목회 전선에 나설 때 두 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책임감이요 또 하나는 사명에서 오는 영광의식이다. 책임감은 침착, 신중, 겸비, 조심, 근면, 순결, 청렴, 복종을 가지도록 할 것이요. 영광 의식은 그로 하여금 대담, 고결, 염치, 용감, 고매하게 해 줄 것이다. 나를 위시한 오늘의 목사들을 보면서 이러 이러한 것은 시정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몇 가지를 지적해 본다. 첫째로 진리에 대한 불손, 거룩함에 대한 불경, 장엄함에 대한 경솔이 있다. 그러므로 자주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 다시 말하면 옳은 길을 가르치는 사람일 뿐 그 옳은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앙이 형식화되고 교회가 이론화되는 현상이다. 둘째로 일상적인 평범한 일, 작은 일에 대한 무관심하다. 목회자에 사명은 영원과 시간, 천계 (天界)와 지상 양자의 중간에 서서 이 둘을 화해시키며 지상의 것을 천계로 끌어 올려야 하며 복음의 진리를 실제 생활로 끌어내려 거기 적응시키는 일이다. 목사는 끊임없이 교인들의 일상 생활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복음 진리의 물줄기가 교인들의 사소한 일상 생활에까지 스며들고 있는가를 엿보아야 한다. 교인들의 현실적인 삶의 고민과 문제와 요구를 찾아봄이 없이 큰 소리만 친다면 이는 상아탑 속의 기독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의 삶을 윤택케 하고 그 고민을 해결해 주는 복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을 하나님 앞으로 안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현실 속에 소개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셋째는 목사 자신의 감정과 의지 곧 인격을 조화 있고 품위 있게 조정하는 일이다. 흔히 목회자 주변에는 신령한 목사님이 되기 위하여 이상스런 모양을 하고 일종의 병적이고 신경쇠약자 같은 풍모를 가지는 모습을 본다. 남을 흉내내어 어리석은 추종을 일삼다가 유사목사 또는 모방목사로 전락하게 된 경우를 본다. 넷째는 세속적인 허영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목회생활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인기, 영 광, 지위, 교권 등에 강한 열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세속적인 이유로 타협주의, 편협주의, 회색주의, 기회주의가 생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권모술수도 사양하지 않으며 기회를 따라, 형편을 따라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아첨을 겸손으로 가장하고 계략을 능력이라 하며 권모술수를 슬기로 가장하고 비굴을 양보라 하는 사고 방식이다. 타협주의는 흑과 백의 중간노선을 걷기 좋아하기 때문에 흑도 아니요 백도 아닌 회색주의에 빠져버린다. 하늘의 복과 인간의 박수를 한꺼번에 얻으려 하고 교회당이나 거리 어구에 기도회를 만들어내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고 나팔 불고 제 보따리 챙기는 위선자가 생겨난다.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위해 충성된 종으로 겸손히 빛도 이름도 없이 섬기는 하나님의 종임을 자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 주의 종,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꾼은 입을 다물고 묵묵하다. 사랑과 충성으로 섬기는 종, 고난의 길을 가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흔히 가난과 고독과 고난을 맛본다. 이것이 이른바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기독교 역사만큼 오래된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관점에 따라서 예수상이 달라진다. 인생의 향방에 대한 새로운 지평선을 창조한 그 분, 일찍이 인간이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길을 개척하신 그 분, 그의 생활, 그의 인격, 그의 생애는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와 사명을 지니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실과 정열로 뭉쳐진 기도의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더듬어 스스로 신앙의 오솔길을 헤쳐 나가는 일이 없이는 제자의 길은 구름 저쪽으로 자취를 감출는지 모른다. 역사를 뚫고 들어오신 타자의 면모를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고 그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 복종할 뿐이다. 우리는
예수 상(像) 바로 세우기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예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지나치게 얌전한 이미지를 고쳐야 한다.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의 평화스런 모습이나 파리하고 나약한 예수의 상(像)은 그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같은 예수상
속에는 눌린 자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불의를 규탄하고 부조리를 질타하며
억압하는 자에 대하여 열화와 같이 분노하는 모습도 찾아야 한다. 경배를
올릴 정적(靜的)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을 위한 모범으로서의 예수를
따르는 목사가 되기를 구현하는 것이 곧 목사상이고 바로 이것을 부활시켜야
한다.
셋째 마당 / 목회관 (信之 民衆化, 望之 歷史化, 愛之 人間化)
나는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에 있는 칠량교회에서 목회 7년과 서울교회에서 교회창립50주년으로 36년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 목회생활 40여 년 이상의 삶을 단 두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특별한 성공이랄 것 없이 조용하게 잔잔히 흐르는 샘물처럼 흐르기만 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비대화해진데도 불구하고 그 본래적인 사명을 비교적 등한히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오늘의 다양화된 사회 속에서 교회의 기능과 사명감도 다양화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선교 신학의 수립이 요청된다. 교회가 어떤 관습적인 형식이나 인위적인 제도, 혹은 습성 따위에 사로잡혀 구태의연한 자세를 일삼고 있다면 아무리 오늘의 번영이나 팽창을 구가한다해도 멀지 않은 장래에 사회는 그 교회를 외면할 것이다. 평소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깨우치면서 나의 목회관을 피력한다. 나의 목회관은 나의 가훈과 같이 信, 望, 愛에 따라 信之 民衆化, 望之 歷史化, 愛之 人間化의 입지를 가지고 오늘까지 임하고 있다. 信之 民衆化란 숫자나 양 속에서 신앙의 힘과 기독교의 저력을 찾으려는 한국교회의 고질적 병폐를 보면서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 정치구도가 그렇듯이 오만한 허세를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 이기심과 탈역사, 탈사회를 위해 한국 교회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억울하게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게 되고 소외되고 병들고 옥에 갇힌 형제나 이웃의 모습으로 민중의 삶의 현장에 오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信之 民衆化의 믿음을 갖는다. 望之 歷史化란 해방후 서구화, 민주화, 도시화, 산업화 등의 구조적 변화는 한국 국민의 욕구 수준을 상승시켰다. 그로 인해 개인 이기주의와 구조적 부조리가 문화풍토에서 번창하여 개인의 범죄와 제도화된 부정부패가 오늘의 현실을 어둡게 하고 있다. 목표를 정당하게, 그리고 착실히 달성하려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편법주의가 이 사회의 질서와 안전을 근본적으로 혼란케 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사회에 한국 교회는 구체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상황에서 요청되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참여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望之 歷史化로 희망의 구현을 내세웠다. 愛之 人間化는 한국 교회가 선교 2세기를 지나 온 과거사에 무당화한 신자로 교회가 확장되는 것을 원치 않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은혜를 받아 구원받았다고 날뛰는 교인들로 전국 복음화가 실현될 것인가? 심히 두려운 마음이 든다. 이 시대에 불한당을 만난 이웃이 있다. 여리고 언 덕에 쓰러져 있는 저 민중을 외면하고 변화산상에 베드로가 세우려 했던 그 초연한 장막 교회에 만 몰려드는 그러한 교인들로 민족 복음화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여리고 언덕 에 쓰러진 그 보잘것없는 민중의 깨어진 인간성을 온전케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인간성을 깨뜨린 강도 떼를 박멸하려는 한국적 사마리아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愛之 人間化의 목회관을 피력한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우리의 생활 양식도 놀랍게 변했다. 그러므로 교회도 이 변천하는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세를 바로 가져야만 한다. 목회자는 오늘의 세상에서 교회의 위치가 어디며, 그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나 자신의 위치 곧 목회자의 직책, 과제, 활동의 한 계를 파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정열이나 뱃심만 있고 거기다가 주변이나 처세술 따위로 가미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오늘의 목회자는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 사람이 한 생애를 두고 성숙해지려면 3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1단계는 받는 단계요, 2단계는 갖는(소유) 단계요, 3단계는 주는(나눔) 단계이다.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고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삶의 철학이 사람을 성숙한 삶으로 이끄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큰 회의와 허무감에 빠져들 때 늘 자신에게 질문하였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삶의 의미와 행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 이러한 물음 끝에 톨스토이는 구원과 해답의 빛을 민중의 삶에서 찾았다. 그는 러시아 농민들의 소박한 신앙과 성실과 근로의 생활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21세기에 하나님의 진실하고 참신한 목사상과 목회상을 전망한다. |



